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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D0110FEB17

Pleia 2017. 2. 10. 16:18

1.
애는 밤에 잠을 잘 때마다 "제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번개맨에 번개걸이 처음 등장 하는 이야기이다.
금빛 전사 제나가 번개걸이 된다.

자려고 누워서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늘 남편이 먼저 잠 들어 버린다. -_-;;
애를 재우고 싶어서 하는 이야기인데 애가 자는 것이 아니고 남편이 코를 골고 잔다.
애는 잘 듣고 있다가 다 듣고 나면 "가짜 번개맨 이야기 해주세요" 하고 말하고
그것까지 듣고 나서 잠이 드는 것이 요즘의 일상.
이야기 끝나고 애가 잠들면 남편도 깬다.

나는 이 이야기를 매일 한 번씩 해야 해서 질렸다.
근데 애가 제나 이야기를 다 듣고 연달아서 또 해 달라고 할 때가 있어서
그건 도저히 못하겠다고 했다.


2월에는 주말마다 계획이 있어 애는 남편한테 맡기고 미장원에 갔다.
항상 집에서는 밥을 잘 안 먹으면서
학교 식당 가서 밥도 엄청 잘 먹었단다. ㅠㅠ

남편은 애를 목욕 시키고 타요 하나 보여주고
일찍 재워보려고 애를 데리고 불도 다 끄고 잠자리에 들었나 보다.
애가 제나 이야기를 해 달라고 해서
남편이 제나 이야기를 하자 애가 아니라고 하면서 엄청 울었단다.

집에 들어와서 씻고 나도 자리에 누웠다.
애가 도 제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남편이 "제나가" 하고 말하자 애가 외친다. "아니야!!!!"

나는 빵 터져서 엄청 웃었다.
이건 뭐 주어만 말해도 아닌 거냐.
첫 시작을 말한 거잖아.

이래 놓고 아침에는 남편이 이야기를 하니
그래도 애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조금씩 고쳐 주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울 아기는 언제나 잠 투정이 심하다.
배고프다고 짜증 부리는 경우는 없는데
잠 자기 전, 자고 일어나서 늘 잠 투정.




2.
나는 기억 못하는 것들을 애가 기억할 때 놀랍다.

어린이집 주차장은 눈이 쌓이고 잘 안 녹는다.
지난 해에 어린이집 주차장에 차를 대었다가
빠져 나오지 못해 애 먹은 적이 있었다.

그래서 한달 쯤 전? 눈이 왔을 때 어린이집 건물 앞쪽으로 차를 잠깐 대고
운전하던 나는 차에서 잠깐 기다리고 남편이 애를 데려다 주고 오기로 했다.
주차장인 건 맞는데 차를 대지 못하게 되어 있는 곳이었다.
애가 어린이집 앞까지는 갔는데 어린이집 들어가면서 "엄마" 하고 엉엉 울었다고 했다.

오늘 눈이 왔고
차를 몰고 어린이집 쪽으로 가자 애가 말한다.
"엄마가 안 가면 내가 울 꺼야."
갑자기 이게 뭔 뜬금 없는 소린가 했는데
금세 깨달았다.
애는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

눈이 왔다.
-> 엄마는 차를 어린이집 주차장이 아닌 앞쪽으로 댈 것이다.
-> 엄마는 차에서 기다리겠다고 할 것이다.
-> 그러면 나는 슬프다. 울어야지.

이런 판단을 벌써 다 하고 있어서
참 신기하다.
기억하는 것도.
지금은 이렇게 많은 것을 기억하면서
다 커서는 이 중에서 한 두 장면 정도 밖에 기억 못하겠지?



3.
지금이 아니고 좀 더 미래에 태어났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권력은 왕에게, 귀족에게, 사제에게 있었다.
백인에게 있었고 남자에게 있었다.

지금도 남녀 평등, 민주주의 사회라고
세상에서는 말하지만
이제야 확실히 알겠는데 권력은 나이 많은 남자에게 있다.

나이 어린 여자는 지금 현 세계 계급에서
최하위급이었고 그 세상을 살다가 이제 막 빠져 나오는 참이다.
그걸 이제야 깨닫겠다.
나는 사람이 다 평등하고,
내가 아닌 저 사람이 내 위에 있는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정말 바보 같고 현실감 없는 이상주의자의 생각이었던 것이다.

나와 ㅂㄱㅎ, ㅊㅅㅅ, ㄱㄱㅊ, ㅇㅂㅇ, 이재ㅇ을 비교하면
엄연히 법 앞에서 다르다.
그들이 내 위에 있다.

권력 분배가 더 일어난 미래에 태어났더라면 좋았을 텐데.
남자로 태어났다면.
좀 더 누릴 수 있는 것이 많았을 텐데.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굴레나 껍질이 부숴지는 걸
내가 책으로만 배운 채로 현실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현실이 아닌 것을 느끼는 것이
매우 생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