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사진을 보면서도,
장례절차가 진행되는 내내,
믿어지지가 않았다.
할머니가 돌아가실 꺼다.
곧 돌아가실꺼니 할머니께 잘해야 한다.
너무 어릴때 부터 너무 많이 들어왔던 말이다.
"곧"이 얼마나 "곧"을 의미하는 지 알 수 없었다.
동네 할머니들, 할머니의 형제나 사촌 형제가 세상을 떠나도
할머니는 늘 계셔서 난 할머니가 150살쯤까지 사실 줄 알았다.
할머니가 좀 편찮으시다 하면 얼른 집으로 쫓아 갔는데
이번에는 토요일엔 적응에 문제가 있는 딸의 유치원 첫 상담,
일요일은 딸의 네번째 생일이었다.
편찮으시다는 소식이 들려 와도 늘 그렇듯이 이번 주는 괜찮을꺼야 하고 생각했다.
딸의 생일날 아침에 일어나니 밤새 동생으로부터 부재중 전화가 여덟개쯤 와 있었다.
아버지는 어차피 아침이나 되어서 연락 하려고 하셨다며 전화도 안하셨다.
아이를 데리고 장례식장으로 갔다.
남편이 짐을 싸고 운전도 했다.
난 그동안 오랫동안 준비해온 마음이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전혀 괜찮지 않았다.
준비는 무슨, 처음 겪어 보는 일이었다.
이 슬픔의 당사자는 바로 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소하게 할머니께서 사랑해 주시던 기억이 밀려 들었다.
대학때 마산에 다녀가면 올라가서 먹으라고 찰밥을 뭉쳐서 주먹밥 해주신 일
고추 까고 다듬고 풀 바르고 말려서 부각 한봉지 만들어 주시면
미국 집의 아주 작은 밀크팬에 기름을 기울여 끓여서 한 번에 여섯개씩 튀겨 먹으면서
일년씩 보내던 일. 매실액, 유자청 뭐 그런 것들.
아주 어릴 때 동네 친구들이랑 개나리 아파트 놀이터까지 가서 놀러를 갔는데
내가 없어져서 집이 아주 난리가 났었다.
개나리 아파트까지 어른들이 우리를 찾으러 왔었다.
내가 집에 돌아오자 할머니가 말했다.
"개나리 아파트건 소나리 아파트건 가면 안된다."
그 말이 우스워서 혼나다가도 막 웃었다.
잔소리 대마왕이었지만 혼낸 적도 없다.
뭘 하라고 하지도 않았다.
집에서 계층의 최하위를 차지하고 사랑 받지 못하고 살던 나를
그래도 그나마 마음을 좀 나눠서 거두고 살던 건 할머니였다.
일년 반만에 귀국해서 집에 갔을 때 김치 못먹는 내게 밥에 먹던 김치만 차려진 저녁상을 주던 엄마.
옷 사줘라 생선 구워줘라 엄마를 시킨 것도 할머니였다.
도대체 할머니가 왜 돌아 가신 건지,
왜 할머니 사진이 저렇게 걸려 있는지
왜 할머니께 향을 피우고 술을 따라서 향 위에 두 번 돌리고 올리는 건지
스님이 축원을 해주시는 염불을 한참 하시는데 울음이 절로 절로 곡처럼 나왔다.
너무나 오래된 동네의 너무나 오래된 종합병원 지하2층 장례식장.
깔린 대자리는 30년은 된 건가 왜 저렇게 낡은 건가.
사람들이 아마 지하 입구에서 담배를 계속 피는지
담배냄새와 하수도에 앉아 있는 것처럼 안 좋은 냄새가 장례식장에 가득 고여서 빠져 나가지 않았다.
담요니 세면 도구니 잔뜩 준비되어 있었지만 쓰면 돈이 나간다고
맨 바닥에 이불도 없이 수건 베고 상주들이 잠을 잤다.
너무 가난하고 초라한 장례식이었다.
난 애가 있어 병원 옆 30년은 된 관광호텔에 가서 애를 데리고 잠을 잤다.
아는 사람들이 왔고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울다가 앉아서 이야기를 하다가 울다가 그랬다.
한숨을 쉬었다가, 이상해 이상해 그랬다가
그렇게 시간이 지나가고 절에 할머니를 모셔 놓고 왔다.
할머니가 안 계신 세상이 왔는데
그 세상에 내가 남아 있어 너무 이상하다.
이런 세상은 안 오는 건 줄 알았다.